미술을 사랑한 기업가(2) 록펠러

미술을 사랑한 기업가(2) 록펠러

미술을 사랑한 기업가(2) 록펠러

나눔의 정신으로 ‘뉴욕현대미술관'(MoMA) 세웠다

 

여미옥 홍선생미술 대표

 

미술을 사랑한 기업가들|록펠러

2록펠러

 

 

뉴욕의 중심가에 있는 뉴욕현대미술관(이하 MoMA·사진)은 세계 곳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세련된 내부 인테리어와 펼쳐지는 명화를 보노라면 MoMA의 탄생배경이 궁금해진다. MoMA을 설립한 세 여성 중 한 사람인 애비 올드리치 록펠러는 유럽 예술작품 수집에 관심이 많았던 상원의원의 딸이다. 그녀는 대학 때 예술의 중심지인 유럽을 순례했고, 예술적 자양분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서양에는 결혼 후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관습이 있는데, 애비 올드리치 록펠러(1874~1948년)란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녀는 록펠러 2세(1874~ 1960년)의 부인이다. 록펠러 2세와 브라운 대학교 댄스파티에서 운명적으로 만나 결혼한 그녀는 사교적이며 세련된 여성으로 사회성이 부족한 남편을 잘 내조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남편의 취향대로 옛 대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는데 1913년에 아모리 쇼를 보고 난 후 현대미술의 후원자가 됐다. ‘우리 아이들이 흥미를 갖고 함께 호흡할’ 작품은 현대미술이라고 생각을 했던 까닭이다.

록펠러 2세가 본인 소유의 저택을 MoMA에 기증하여 미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만들기까지에는 아버지인 록펠러 1세(1839~1937년)의 부가 원천이었다. 1세대인 록펠러는 자녀들에게 ‘낭비하지 마라. 돈을 쓸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걸 항상 잊지 말아라’고 교육했다. 그는 어릴 때 집에서 만든 초라한 옷을 입고 학교에 가는 게 부끄러워 언젠가 좋은 옷을 사 입을 수 있을 만큼 돈을 많이 벌겠다고 친구들에게 장담했다. 16세 때 그의 첫 직장은 곡물위탁판매회사. 그는 회계 장부를 기록하는 경리사원이었다. 1859년에 열심히 일해 번 돈 800달러와 아버지로부터 빌린 돈을 합해 친구와 2천 달러씩 투자하여 곡물중개회사를 설립했다. 남북전쟁 중에 석유 수요가 많아지는 것을 보면서 정유소와 정제공장도 세웠다. 또한 석유를 운반하는 회사에서 철제탱크를 개발해 품질혁신은 물론이거니와 가격까지 인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38세에 미국 정유산업의 95%, 세계 석유산업의 62%를 차지하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록펠러 1세는 55세 때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검진을 받기 위해 방문한 병원 로비에 걸린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라는 액자를 보는 순간 한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우연히 사람들이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를 듣고 비서를 통해 소녀를 돕게 되고 나눔의 행복을 맛보았다. 신기하게 그의 병도 낫게 되어 57세부터 일선에서 은퇴해 98세까지 자선사업을 했다. MoMA가 세워진 데에는, 록펠러 2세와 부인의 예술사랑이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의 자손들도 대를 이어 미술관에 기부하고 미술관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록펠러 1세가 이룬 거대한 부와 나눔의 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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